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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강해(26) - 둘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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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26) - 둘째 인

 

둘째 인 : 전쟁의 적마

성경구절 - 요한계시록 6:3 ~ 4

                Holy BIBLE 생명의 삶 영어 한글 성경 말씀 - 요한계시록(Revelation) 5장,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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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둘째 생물의 사회로 시작됩니다.

요한계시록 6장 3절에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은 생물입니다(요한계시록 4:7).

그 생물은 충성과 인내의 표상이었습니다.

 

2. 전도자 요한에게 먼저 공개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3절에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인의 정체와 내막은 비밀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에게 공개되어진 것입니다. 보고, 듣고, 읽고,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신자)는 역사의 선각자입니다.

 

II. 적마 탄 자의 출현

요한계시록 6장 4절에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은 앞서 나온 백마와 대조시키는 말로써 붉은 말을 의미합니다.

누구일까요?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자는 이를 팔티아 군의 침입을 막을 때 사용한 로마(Rome)의 주무기였던 ‘활’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혹자는 이를 ‘로마(Rome)의 내란’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혹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일고를 요하는 해석입니다.

더 확실한 해석은 ‘붉은 말’이란 피가 묻어서 붉어진 전마를 의미함입니다.

그렇다면 벌써 무수한 전쟁을 치른 말이고, 앞으로도 많은 피로 얼룩질 말을 상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전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영토 분쟁이나 주권 쟁탈을 목적함이 아니라 그 전쟁의 결과가 교회 박해와 교회 잔해를 목적하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붉은 말 탄 자의 사역을 보면 명백합니다.

 

III. 적마 탄 자의 사역

1. 땅에서 화평을 제거하는 사역을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4절에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화평’은 국제간의 평화를 시도함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화평을 말합니다.

주님은 화평의 복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화평케 하러 오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평화가 그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이 적마의 사역은 복음 사역에 대한 도전입니다.

참된 교회 운동의 생명이 바로 화평 운동입니다.

적마 탄 자가 화평을 제하여 버림은 곧 교회 운동의 제거를 의미합니다.(마태복음 5:9, 에베소서 2:14)

 

2. 서로 죽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4절에 「… 서로 죽이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도전합니다.

우리는 여기 서로 ‘죽이게 하고’(Slaughter)라는 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일반 전쟁의 살인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3장 3절에 사용된 단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단어가 악도들이(불신 세력) 성도들을 죽이는 데 모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요한일서 3장 12절에 「가인… 그 아우를 죽였으니」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자인 아벨은 신자를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도 「…일찍 죽임을 당하사」, 요한계시록 5장 1절에 「…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요한계시록 6장 9절에 「… 죽임을 당한 영혼들」,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 요한계시록 18장 24절에 「…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 보였느니라」고 한 경우들입니다.

이런 경우 ‘죽이게 함’이란 악도(불신 세력)들이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죽이는 경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이 세상의 여러 형태의 전쟁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자녀 박멸이라고 하는 데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비록 그 전쟁의 동기가 영토 분쟁이나 세력 확장이었을지라도 그 모든 전쟁의 마지막 귀착점이 성도를 죽이는(교회 잔멸) 경지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실례로 제2차 세계대전 시 일본 군국주의는 나중에 한국 교회의 잔멸을 꾀함에 이르고 만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4절 하반절에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1) 제물을 잡는 도구

여기 ‘큰 칼’(Macharia)은 성경에 주로 제물을 쪼갤 때 사용된 칼(짐승 도살용)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혹자들은 이것을 전쟁 중에 쓰이는 군도를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 전쟁과 살육 행위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재림 징조 중의 하나입니다..(마태복음 24:6 ~ 8)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중 고난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전쟁 자체로 말미암아 오는 고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전쟁 수행 중에 오는 신앙 양심 파수라고 하는 고난입니다.

 

과거 한국 교회는 이런 이중 고난의 환난을 겪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민족적 차원에서도 항쟁해야 하고, 신사참배 강요에서 오는 신앙양심 파수, 교회 파수, 진리 파수로 인한 고난까지 겸해야 했습니다.

 

(2) 혹자는 이 ‘큰 칼’을 대량 살생의 도구로 등장한 현재의 핵무기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사실 오늘의 세계 강대국이 보유한 원자탄의 수는 수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미국이 보유한 것만도 약 20,000 개나 된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현재 세계에서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인류를 40번이나 진멸시킬 수 있다고 하니 실로 큰 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은 현대에 이를수록 그 결과가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19세기까지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400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850만이 죽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7,800만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전쟁 비용의 경우도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적군 한 사람을 죽이는데 75센트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한 사람을 죽이는 데 15,000달러,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그 곱인 30,0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 때는 일인당 50,0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베트콩 하나를 사살하는 데 무려 80만 달러를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비극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가?

세계의 마지막 큰 전쟁은 요한계시록 16장 12~16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아마겟돈 전쟁은 그 마지막이 교회 박멸을 목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마 탄 자(복음 운동)의 뒤에 따라오는 이 붉은 말 탄 자의 정체는 단순한 세상 전쟁이 아니고 교회(하나님의 자녀)를 잔멸하기 위한 종교적 핍박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4. 그러나 교회(성도)는 이 전쟁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6장 4절 중에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전쟁 수단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탄의 무제한적 난동이나 훼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결코 역사의 무대는 사탄의 독무대일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욥의 환난(전쟁)에서 이 원리를 배웁니다.

문제는 우리 성도가 이러한 전쟁 중에서 그 피해를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 대답은 한 가지로 결론짓기에 곤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 세상 전쟁과 살육행위의 비극 속에서도 주를 향한 택자들의 구원 신앙과 은혜는 결코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한 것 또 하나는 역사상에 일어난 전쟁의 결과는 복음 운동의 확장과 관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전쟁을 통하여 교회를 잔멸하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적 역사를 통하여 그 전쟁을 이용하여 복음 운동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는 경우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디도 장군이 유대를 침공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유대인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됨을 인하여 복음이 널리 증거되고, 그 결과 여러 지방에 교회가 많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Rome) 제국 산하에서는 제5세기경까지 복음이 각처에 빨리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시기가 바로 로마가 무력(전쟁)으로 세계를 정복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때를 같이하여 주의 복음이 로마(Rome) 권력이 미치는 세계 도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라파 각처에는 복음이 훨씬 늦게 들어갔습니다.

주후 476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했을 때 많은 로마인들이 포로가 되어 구라파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포로 가운데 있던 신자들이 복음을 구라파에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크족도 역시 전쟁 중에 그들의 왕 클로위가 복음을 믿게 되어 그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독일도 로마의 침입으로 인하여 로마에서 잡혀간 전쟁 포로들이 독일로 끌려가 사는 중에 독일인들에게 전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일랜드도 전쟁 포로로 말미암아 복음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일랜드 타운이란 지방에 한 포로가 6년간 수용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패트릭인데 그가 16세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양을 치는 일을 하면서 그가 어려서 받은 예수의 복음을 그 곳 사람들에게 소개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가 귀국하게 되고 장성하여 선교사가 되어 다시 그곳에 가서 자기가 종살이하던 그 주인집의 목장을 교회로 삼아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람 나라 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치룬 전쟁의 비극을 통하여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포로 소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각성케 하고 부끄럽게 했습니다.

저들은 천국을 부인하고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라고 주장하다가 전쟁으로 인하여 저들의 허구성이 자증되고 만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통에 한국이 입은 민족적, 문화적, 역사적 참상과 피해는 실로 막대합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하여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저울대 위에서 가라지와 알곡을 구별하게 되었고, 순교의 피를 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의 일본 제국주의가 하나님의 천벌을 받고 말았다는 사실을 1945년 8월 15일의 교훈을 통하여 잘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6.25 동란은 실로 골육상쟁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 때문에 수많은 교회의 순교자를 얻게 되었고, 또한 공산주의가 하나님의 원수, 진리의 원수, 교회의 원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6.25 동란을 통하여 수많은 이북의 성도들이 월남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남한 전역에 참으로 많은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6․25 사변을 통하여 한국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는 회개 운동의 축복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붉은 말 탄 자가 큰 칼을 받아 가지고 있어도 언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 아래서 만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결코 붉은 말 탄 자의 전쟁 때문에 성도는 굴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확신해야 합니다.

 

앞으로 예기되는 핵전쟁은 불과 15분 내외에 세계가 자멸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계적인 자멸의 전쟁이 예수 재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유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교회)는 벧엘도 찾지 말고, 길갈로도 가지 말고, 브엘세바에도 가지 말고, 여호와만 찾아야 할 것입니다.(아모스 5:5 ~ 6)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

 

<<설교 영상 - 요한계시록 강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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