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두 사람
성경 구절 - 마태복음 4:36 ~ 44
Holy BIBLE 생명의 삶 영어 한글 성경 말씀 - 마태복음 Matthew 4장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당시 돈만 내면 모르는 것이 없이 잘 가르쳐주던 소피스트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저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촉진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천재였습니다. 순결 무욕했고, 솔직했으며, 따뜻한 인간애와 종교심 그리고, 위트와 유머감각까지 지니고 있어 당대에는 물론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철학자 중 철학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 아테네는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는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리에 힘이 없다고 하며 조용히 누웠다. 간수는 그의 발을 세게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없다고 대답했다. 간수는 다리를 눌러보고는 차츰 위로 올라가면서 몸이 굳어진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천을 걷어내면서 '크린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가 좀 갚아주게.'라고 부탁했습니다.
크린톤은 '꼭 갚아 주겠네. 더 할말이 없는가?'라고 답변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응답이 없었습니다.
1~2분 후 몸이 약간 움직였고,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린톤은 그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도대체 소크라테스가 남긴 마지막 말인 아스클레오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말입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서 완쾌된 자는 병을 고쳐주는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병든 아테네를 치유하다가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아테네가 치유되어서 모두가 착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그때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감사의 제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다오'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유추적 해석을 합니다.
문제의 초첨은 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정신적 쾌유를 위해 살다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무도, 그 누구도 소크라테스의 유언대로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쳤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인간의 어두움은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불확실한 미래를 남기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보십시오.
그는 마지막 감람산 강화에서 개인과 역사의 확실하고 분명한 종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주적 종말의 징조를 예언하였습니다.(마태복음 24장)
그리고, 그 종말의 대비책을 비유로 교훈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5장)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은 모든 인류가 알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의 재림 시기 앞에 두 사람, 두 세계의 삶과 종말의 분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1. '그 때에 두 사람'은 공존공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40절에 '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라고 하였고, 41절에 '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두 사람'은 남자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밭에 있다' 함은 생존경쟁의 현장을 말합니다.
모든 경우의 직장 전선, 노동 전선, 생존 전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밖의 일들도 뜻합니다.
또 '두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집안의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여자가 ' 맷돌질을 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두 남자와 두 여자는 똑같은 숫자적 개념을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50 % 대 50 %라는 뜻도 아닙니다. 함께 섞여 사는 두 세계의 공종공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섞여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마태복음 25:1 ~ 13),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마태복음 25:14 ~ 30), 그리고 양과 염소(마태복음 25:31 ~ 46)와 같은 경우입니다.
신자로 상징된 나사로와 불신자로 상징된 부자의 경우입니다.(누가복음 16:19 ~ 31)
좁은 문과 넓은 문(마태복음 7:13 ~ 14), 가라지와 알곡(마태복음 13:24 ~ 30)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세계의 공존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사는 세상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직장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차별성이 없는 공존공생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는 육신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끝나는 그 때까지 두 세계는 공존하고 공생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2. ' 그 때에 두 사람'은 분리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41절에 '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 가운데서 중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① 그 때 두 공존공생의 삶에는 끝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유한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때'라는 말입니다.
여기 '그 때'는 예수님 자신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도 '그 때'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마태복음 25:1)
종의 비유에서도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그 때'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마태복음 25:34)
히브리서 10장 37절에는 '오실 이가 오시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0절에는 '그 날에 강림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에는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인자의 때'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에는 '주 예수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1:8, 고린도후서 1:14)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는 '마지막 날(끝날)', 유다서 1장 6절에는 '큰 날', 마태복음 10장 15절에는 '심판 날', 로마서 2장 5절에는 '진노의 날', 에베소서 4장 30절에는 '구속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존공생하는 시간이 끝나는 날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섞여 사는 때가 끝나는 날입니다.
바로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작정해 놓으신 크고 중한 비밀의 날입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마태복음 24:36, 마가복음 13:32)
'두 사람'의 세계는 '그 때', '그 날', '그 시간'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② 그 때에 두 사람은 분리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또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다 현재형으로 확실한 미래사를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데려감을 당한다'는 뜻은 슬기로운 처녀가 예비하였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경우입니다.(마태복음 25:10)
충성된 종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경우입니다.(마태복음 25:21)
오른편에 있는 양이 영생에 들어가는 경우입니다.(마태복음 25:33, 46)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 하면 잠자던 무덤에서 일어나 생존자들의 변화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림을 당하여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경우를 말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17)
'버려둠을 당한다'는 뜻은 문이 닫혀 혼인잔치에 들어갈 기회를 놓쳐버린 자의 경우입니다.
미련한 처녀의 경우입니다.(마태복음 25:10 ~ 12)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의 경우를 가리킵니다.(마태복음 25:30)
염소로 비유된 불신자가 영벌에 들어가는 경우를 가리킵니다.(마태복음 25:46)
③ 그 때에 그 분리의 기준이 예수 신앙과 불신앙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확실한 진리는 믿는 자는 영생,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불신자에게는 멸망이라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3:16, 18)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불신자는 사망의 부활,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24 ~ 29)
이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요체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버림을 당한 것은, 저들이 예수를 불신앙 하였다는 단 한 가지의 이유뿐입니다.
④ 그 때 두 사람의 삶의 목적이 달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생을 받았습니다. 같은 장소와 시간을 받았습니다. 같은 노동의 재능을 받았습니다. 같은 밭과 같은 매라고 하는 재원과 노동의 수단을 받았습니다.
결코 밭에서 일하고, 집에서 매를 돌리는 것이 죄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축복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짓는 문화생활을 하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생존의 목적과 의의와 가치와 내용과 방향이 어디 있었는가가 중대합니다.
인생에서 주어진 온갖 유의 생존 수단, 그 자체에는 반드시 목적이 수반됩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살아가는 생존의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주를 위하여 밭을 갈고 매를 돌렸습니다.
반대로 또 다른 한 남자와 여자는 자기를 위하여 아니면 맹목적으로 무의미하게 밭을 갈고 매를 돌렸습니다.
노아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도 그 시대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옷 입었습니다.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주를 짓는 일을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와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반대로 그 시대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던 것입니다.
한편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또 한편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했습니다.(요한복음 6:27)
예수를 믿고 사는 그 자체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은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고, 밭을 갈고, 맷돌을 돌렸습니다.
또 한편은 주를 위하여 밭을 갈고 맷돌을 돌렸습니다.(로마서 14:6 ~ 8)
속이 달랐습니다. 내용이 달랐습니다. 목적이 달랐습니다.
우리 속담에 '비둘기 몸은 산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 신자들은 몸은 밭에 있고, 손은 맷돌을 붙잡고 있어도 그 삶의 내용과 목적은 주를 위함에 있습니다.
같은 일에 공존공생하면서도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용적 차별의 삶입니다. 목적적 차별의 삶입니다.
⑤ 그 때에 두 사람의 결국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당하는 그 때의 사건은, 전혀 두 사람 자신의 주장함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전혀 피동적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당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필연적인 당함입니다.
그 때 역사의 현장에 나타나신 주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만유의 주이십니다.
자신의 약속대로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실 분이십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으로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언제난 그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확실하고, 현재에도 확실하고, 미래에도 확실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미래인 종말과 역사의 미래인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 너무나도 확고부동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영존하고, 자신이 전지하고, 자신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신 말과 행동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전 자연계에 이변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 그리스도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도 세계적인 복음 운동의 종말선교가 땅끝까지 전개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는 그 때 두 사람 중에 속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역사는 멈추지 않고 그 날 그 때를 향하여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탁은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24:42 ~ 43)고 하였습니다.
각성하는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각성의 삶이 열심있는 독경, 예배를 위한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 생활에서의 설교체험, 끊임없는 가정예배, 힘쓰는 기도와 전도, 찬미와 감사로 펼치는 기쁨, 진리의 사자들을 양성하는 귀한 신학교 운동, 주의 뜻에 적중하는 마지막 세계선교운동, 마지막 진리운동의 보루로 받은 새 성전 헌당 운동인 것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 나은 미래지향적 축복의 약속이 아닌가! -아멘-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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