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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강해(16) - 하나님의 보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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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16) - 하나님의 보좌(2)

 

하나님의 보좌(2)

성경구절 - 요한계시록 4:2

                 Holy BIBLE 생명의 삶 영어 한글 성경 말씀 - 요한계시록(Revelation) 3장, 4장

 

사도 요한은 정배지 밧모섬에서 주의 날 성령에 감동 속에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종말 계시의 비밀을 받게 되었습니다.

먼저 아시아 일곱 교회들의 진상을 보게 되었으며, 이제 4장에 와서 요한계시록의 출원지인 「하늘의 보좌」를 보게 되었습니다.

 

III.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무슨 뜻인가?

  1.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땅에 있지 아니함을 뜻합니다.

 

  2.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초자연 세계에 속한 실존으로 인조적인 것과 대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이성 작용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실존의 세계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영계의 실존으로, 육으로 알고 이해하기엔 불가능합니다. 이 실존의 세계에 육은 실로 무익합니다.

 

  4.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오직 믿음으로만 감지되는 실존의 세계임을 의미합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이 실존의 세계를 듣거나, 보거나, 말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5.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영구한 도성이 실존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보좌는 영구히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흔들리고 있으며 변하고 있습니다. 쇠하고 있습니다. 불안스럽고, 공포스럽습니다. 그것은 온갖 부조리와 부패와 피로 얼룩진 보좌들이기 때문입니다.

 

  6.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성도에게 신(信)․망(望)․애(愛)를 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나, 보좌가 없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장차 올 하늘에 있는 보좌만이 우리에게 영구한 도성이 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하늘에 있는 보좌」의 소망 때문에 여기서 절망할 줄 모릅니다.

 

  7. 하늘에 보좌가 있다 함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통치를 뜻합니다.

    그것은 ① 영토, ② 백성, ③ 통치자로서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가 「보좌에 앉아 계시다」함은 구원과 심판의 대주재로서 만유를 통치하고 있다 함이 아닌가?

바로 「하늘에 있는 이 보좌」는 지상 전투교회의 사령탑이 아닌가?

온갖 승리의 사인(sign)이 발송되어 오는 곳이 아닌가?

 

 

 

 

 

 

 

IV. 하늘의 보좌를 관계하는 비결

1. 하늘의 문이 열려야 한다. (성부 계시)

요한계시록 4장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몇 가지 질문을 생각한 바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경우 「열린 문」 곧 형통의 문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8)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문을 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회개의 문 곧 마음의 문입니다. 본문의 경우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은 인간 편에서나 아니면 사도 요한이 열어야 될 문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열어야 될 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열린 문 안의 내막을 봐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열어 놓으신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을 인생에게 열어 놓으신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마태복음 3:16~17)

스데반 집사의 순교 시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그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이 영광의 세계에 도취하여 승리의 최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7:56)

에스겔이 그 백성과 함께 포로지인 바벨론 그발 강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묵시를 주신 일이 있습니다.(에스겔 1:1)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젖히시고 그에게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사도행전 10:11~16). 그것은 복음운동의 이방 정복을 나타내는 계시였습니다.

저들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을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 문이 열릴 때 큰일을 할 수 있는 비전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릴 때 사람 구실을 하고, 선지와 사도의 구실을 하였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렸을 때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오늘 지상 교회의 소망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려야 개인과 교회의 진로가 열립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아니할 때 개인과 교회와 국가의 앞날은 암담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문이 열림은 바로 우리가 사는 순간이요, 축복을 받는 순간이요, 희망에 넘치는 시간이 아닙니까?

 

하늘의 문은 하나님만이 열 수 있는 문입니다.

그 이유는, ① 그 위치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② 그곳이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③ 모든 축복이 오직 거기로부터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 있어야 합니다.(성자 계시)

요한계시록 4장 1절 중에 다시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음성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1:10).

영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계시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을 깨우는 음성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음성이요, 소망을 자극하던 음성이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용 자세를 정립시키는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인 신․구약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의 집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천국)를 관계하는 첩경은 바로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음으로 하나님 보좌의 실존을 관계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 성경이 바로 그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계시야말로 하나님 보좌(천국)를 관계하는 힘 있는 실존입니다.

성경을 믿음으로 그 보좌의 내막을 감지하고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이룩한 결정적인 힘은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 곧 성자 예수의 말씀 곧 기록된 성경인 것입니다.

 

 

 

 

 

 

 

3.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성령 계시)

요한계시록 4장 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내가 성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혹은 ‘내가 성령 안에서 새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곧 그는 밧모 섬에서 하늘의 보좌를 상대하고 왕래하는 새로운 차원의 세례로 성화의 깊은 은총을 입은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 됩니다.

말하자면 영적 체질로의 성화의 개선입니다.

 

영계를 상대하는 성도에게 이런 성령 안에서 새로 만들어져 가는 고도의 상승 변화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3:6).

② 육은 영에게 무익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6:63)

③ 성령이 없이 육신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9)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비중생자는 제외됩니다.

④ 영의 일은 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14~15)

⑤ 하나님 보좌 자체가 영계이므로 영으로 주장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 안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상태가 신비의 극치요, 영화의 극치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세계의 힘이요, 신비요, 낙이요, 소망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보좌 곧 천국을 관계하는 비결은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 편에서 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요한계시록 4:1)

성령께서 충만케 해 주어야 관계할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4:2)

 

말하자면 성자 성부 성령의 자기 계시에서만이 천국(보좌)을 관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 작용으로는 천국의 실존을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즐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린도후서 5:7)

여기에 기독교 타율주의 계시의 특색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

 

<<설교 영상 - 요한계시록 강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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